1562년 12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작성되어 1563년 1월 독일어로 출판됐다. 이 요리문답은 총회의 승인을 받았으며, 불링거는 이를 높이 평가하여 칼빈과 베자에게 프랑스어로 번역해 사용해 달라고 요청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발간된 해에 세 판이 추가로 인쇄될 정도로 대중에게 빠르게 알려졌고, 주일에 간단히 교리를 가르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요리문답이 처음 출간되자 독일 전역에서는 이를 선전포고로 받아들였고, 루터파 교회로부터 격렬한 반발을 받았다.
틸레만 헤수스와 플라키우스 일리리쿠스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칼빈주의적 요리문답이라 부르며 비방과 욕설을 퍼부었다. 이러한 공격으로 인해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와 그의 개혁신학자들은 심각한 시련에 봉착했다. 이에 우르시누스는 하이델베르크의 연합 신학 교수회의 이름으로 답변서를 출간하는 임무를 맡았다.
프리드리히 3세는 1566년 아우구스부르크 회의에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며 황제를 감동시켰고, 이후 황제의 지원 속에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완성됐다. 1559년부터 1622년까지의 기간은 제2의 종교개혁 기간으로 불리며, 이 시기에 칼빈주의 개혁교회들이 학문과 출판, 철학의 꽃을 피웠다.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와 도서관, 번창하는 출판사들은 칼빈주의 신앙의 가치를 구현하고 있었으며, 하이델베르크는 개혁신앙을 가진 목회자들의 피난처 역할을 했다. 우르시누스는 1571년 로잔으로부터 청빙을 받았으나 하이델베르크에 남았다.
프리드리히 3세의 사망 후, 그의 아들 루이스 6세가 선제후가 되면서 하이델베르크에 정치적 변화가 생겼고, 루이스 6세는 루터파로 복귀했다. 이로 인해 우르시누스는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쫓겨났다. 이후 그는 카시미르 공작의 보호를 받으며 노이슈타트 김나지움에서 교수로 임명되었다.
우르시누스는 1583년 3월 건강이 나빠져 사망했으며, 노이슈타트교회 성가대석에 안장되었다. 그의 강의는 편집되어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서 주석』으로 출판됐다. 우르시누스는 개혁교회의 신앙을 대변하는 인물로 평가받고 있으며, 그의 신앙에 대한 연구는 제한적이다.
우르시누스는 내면적으로 안정된 성품과 경건한 삶을 유지하며, 오류를 저항하고 진리를 지키는 데 단호한 태도를 보였다. 그는 개혁교회 전체의 대변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사진제공 : 크리스천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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