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무역의 기억 앞에서, 선교는 누구의 자유를 말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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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무역의 기억 앞에서, 선교는 누구의 자유를 말해야 하는가

아프리카의 노예무역 흔적은 과거의 비극을 보여주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우간다와 탄자니아의 옛 노예 이동 경로, 잔지바르의 거래 현장, 그리고 대서양 건너 미국 남부의 기억은 인간이 다른 인간을 물건처럼 다뤘던 역사가 얼마나 넓고 깊었는지를 드러낸다. 이 역사를 마주할 때 기독교 선교 역시 자신과 무관한 위치에 서 있을 수 없다.
선교는 복음을 전한다는 이름으로 타인의 땅과 문화, 삶의 현실을 어떻게 대했는지 늘 물어야 한다. 유럽의 팽창과 식민 지배가 진행되던 시대에 일부 기독교인과 교회는 노예제와 인종차별적 질서에 침묵하거나 이를 정당화하는 데 가담했다. 반대로 많은 신앙인들은 인간을 사고파는 제도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의 존엄을 훼손한다고 고백하며 폐지운동에 나섰다.
18세기 후반부터 영국 교회 안에서 노예무역을 성경적으로 용납할 수 없다는 반성이 커졌고, 이는 노예무역 폐지운동으로 이어졌다. 1807년 영국의 노예무역 폐지는 이러한 흐름에서 나온 중요한 변화였다. 이 역사는 교회가 언제나 정의의 편에 서 있었다는 증거가 아니라, 교회가 자기 시대의 죄를 깨달았을 때 회개와 행동으로 응답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복음은 영혼만이 아니라 사람 전체를 향한다
아프리카 선교사 데이비드 리빙스턴이 노예무역의 현실을 알리고 폐지를 위해 힘쓴 일도 같은 맥락에서 읽을 수 있다. 그가 내세운 기독교, 상업, 교육의 이른바 ‘3Cs’는 오늘의 기준에서 비판적으로 검토할 부분도 있다. 특히 ‘문명화’라는 언어가 식민주의적 우월감과 결합했던 역사까지 외면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노예무역이 남긴 파괴를 멈추고, 지역 주민이 착취가 아닌 삶의 기반을 갖도록 해야 한다는 문제의식 자체는 중요하다. 복음이 개인의 내면에만 머문다면, 굶주림과 폭력, 강제노동, 인신매매 속에서 살아가는 이웃의 현실을 지나치기 쉽다. 예수께서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선포하는 사명을 말씀하신 누가복음 4장의 장면은 구원이 인간의 실제 고통과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우간다 교회가 외부 선교사의 활동을 넘어 현지 신자들의 자립과 참여를 통해 성장해 온 과정도 주목할 만하다. 특히 동아프리카 부흥운동에서 평신도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은 선교의 주체가 누구인가를 다시 묻게 한다. 선교는 누군가를 일방적으로 변화시키는 사업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를 형제자매로 받아들이고 지역 공동체가 스스로 복음의 삶을 살아가도록 돕는 일이어야 한다.
현대판 노예제는 먼 나라의 일이 아니다
노예무역은 제도적으로 폐지됐지만, 인간 착취는 사라지지 않았다. 강제노동, 인신매매, 채무와 고용관계의 악용, 성착취, 이주노동자에 대한 임금 착취는 오늘도 여러 형태로 나타난다. 호주에 사는 한인 사회 역시 예외가 아니다. 일터에서 여권을 빼앗기거나, 임금을 받지 못하거나, 비자 문제를 빌미로 협박받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단순한 개인 간 갈등으로 치부할 수 없는 인권의 문제다.
교회와 신앙인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먼저 안전한 말을 건넬 수 있어야 한다. 피해 사실을 함부로 공개하지 않고, 당사자의 의사를 존중하며, 필요하면 신뢰할 수 있는 지원기관과 법률·노동 상담 창구를 연결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고용주나 공동체 지도자의 위치에 있다면 더욱 투명한 임금 지급, 적정한 노동환경, 권리 안내를 실천해야 한다.
갈라디아서 5장은 자유를 자기 욕망을 위한 기회로 삼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 섬기라고 가르친다. 기독교가 말하는 자유는 강한 사람이 더 많은 선택지를 누리는 자유만이 아니다. 두려움 때문에 말하지 못하는 사람이 안전하게 말할 수 있고, 착취당한 사람이 존엄을 회복하며, 이웃의 짐을 함께 지는 자유다.
노예무역의 역사는 선교에 불편한 질문을 남긴다. 우리는 복음을 전하면서도 누군가의 목소리를 지우고 있지는 않은가. 교회의 선한 사역을 말하면서도 그 사회의 불의에는 무감각하지 않은가. 그 질문 앞에서 겸손히 회개하고, 오늘의 착취를 줄이는 구체적 선택을 하는 것, 그것이 인간을 자유롭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더 정직하게 증언하는 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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