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뢰를 잃은 교회가 다시 세워야 할 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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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뢰를 잃은 교회가 다시 세워야 할 다리

한국 개신교를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이 차갑다는 진단은 더 이상 낯설지 않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 조사에서 언급된 사회적 신뢰도 19%라는 수치는 교회가 말하는 복음과 시민들이 실제로 경험하는 교회의 모습 사이에 큰 간격이 있음을 돌아보게 한다. 최근 목회자와 신학자 7명이 펴낸 ‘선을 넘어 다리를 놓다’도 바로 이 간격을 정면으로 다룬다.
낮은 신뢰의 원인을 단지 ‘세상이 교회를 오해하기 때문’이라고 돌려서는 회복의 길을 찾기 어렵다. 교회가 배타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현실, 확인되지 않은 정보가 신앙의 언어를 입고 퍼지는 문제, 정치적·교파적 입장 차이가 형제자매를 향한 적대감으로 번지는 모습은 우리 안에서 먼저 성찰할 일이다. 진리를 지키려는 열심 자체가 문제라기보다, 그 열심이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고 밀어내는 방식으로 드러날 때 복음의 증언은 힘을 잃는다.
예수님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분리하지 않으셨다. 누가복음 10장의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는 ‘누가 내 이웃인가’를 묻는 사람에게 경계 밖의 사람을 돌보는 긍휼을 보여 준다. 이 비유는 교회가 모든 차이를 없애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서로 다른 배경과 입장 속에서도 고통받는 이웃을 외면하지 말라는 요청이다. 신앙의 정체성은 담장 높이보다
사랑의 실천에서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포용성이라는 말도 조심스럽고 정직하게 사용해야 한다. 포용은 불편한 질문을 피하거나, 신앙의 핵심을 가볍게 여기자는 구호가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회개와 믿음의 복음을 소중히 고백한다. 동시에 그 고백이 타인을 조롱하거나 낙인찍는 면허가 될 수 없음을 기억해야 한다. 에베소서 4장이 말하는 사랑 안에서의 진실함은 진리와 사랑 가운데 하나만 선택하는 태도가 아니라, 둘을 함께 붙드는 성숙을 가리킨다.
특히 디지털 환경에서 교회의 책임은 더 무겁다. 메신저 대화방에서 전달되는 짧은 영상과 자극적인 글은 사실 확인 없이 쉽게 공유된다. 신앙인이라면 내용이 자신의 정치적 성향이나 불안과 맞아떨어진다는 이유만으로 퍼 나르지 말아야 한다. 출처가 분명한지, 원문과 맥락이 있는지, 누군가의 명예와 안전을 해칠 소지가 없는지 확인하는 습관은 작은 일이지만 이웃 사랑의 한 방식이다.
교파와 교회 사이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한국교회에는 교단의 차이를 넘어 교육·구제·선교와 사회적 섬김을 위해 협력해 온 역사가 있다. 물론 신학적 견해 차이를 억지로 감추거나 모든 연합을 선한 것으로 미화할 수는 없다. 그러나 서로 다른 전통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공통의 신앙고백과 이웃 사랑의 책임 아래 대화하고 협력할 길까지 닫아버릴 이유는 없다. 로마서 12장의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는 권면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끼리만 나누는 위로가 아니다.
호주에 사는 한인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이 문제는 멀지 않다. 한인교회는 낯선 사회에서 언어와 돌봄의 공동체가 될 수 있지만, 내부 결속이 지나치면 지역사회와 다음 세대에게 닫힌 공간으로 보일 위험도 있다. 교회 안에서 다른 세대의 질문을 경청하는지, 이웃의 필요에 실제로 응답하는지, 교회 밖 사람도 존중받는다고 느끼는지를 점검할 필요가 있다.
신뢰는 홍보 문구나 일회성 행사로 되찾기 어렵다. 잘못된 말을 바로잡고, 피해를 준 일이 있다면 변명보다 사과를 앞세우며, 작은 약속을 성실하게 지키는 과정에서 서서히 쌓인다. 교회가 다시 다리를 놓는다는 것은 세상의 박수를 얻기 위한 전략이 아니라, 먼저 사랑하신 그리스도의 길을 배우는 일이다.
우리가 세운 선이 누구를 보호하는지, 또 누구를 불필요하게 밀어내고 있는지 묻는 데서 회복은 시작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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