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령지의 예배를 통제할 때, 신앙은 권력의 도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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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령지의 예배를 통제할 때, 신앙은 권력의 도구가 된다

전쟁은 영토와 군사력의 충돌로만 기록되지 않는다. 사람이 어느 언어로 말하고, 어떤 공동체와 연결되며, 누구와 함께 예배할 수 있는가의 문제도 전쟁의 한복판에 놓인다. 영국 정부의 종교 또는 신념의 자유 특사인 데이비드 스미스 의원이 러시아 점령지에서 러시아정교회가 정치적 통제의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는 우려를 제기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가 지적한 핵심은 특정 교파를 향한 비판 자체가 아니다. 국가 권력이 한 종교기관에 특권적 지위를 부여하고, 그 밖의 신앙공동체가 자유롭게 모이고 예배하며 섬길 권리를 제한한다면 문제의 본질은 달라진다. 우크라이나 외교부도 점령 지역에서 독립적인 종교 활동이 억압되고 있다고 밝혀 왔다. 크림반도의 기독교인과 타타르인들이 겪는 자유의 박탈 역시 같은 맥락에서 거론된다.
기독교 신앙은 국가 권력이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만 존재하는 장식물이 아니다. 교회는 세상의 권세보다 높은 하나님께 예배하고, 복음에 따라 양심을 지키도록 부름받은 공동체다. 따라서 교회가 권력의 언어를 그대로 되풀이하도록 강요받거나, 특정 국가와 민족의 정치적 목표를 성스러운 일처럼 뒷받침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면 교회 자신도 깊은 상처를 입는다.
예수님은 권력을 장악해 사람을 복종시키는 방식이 아니라 섬김의 길을 보이셨다. 마가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은 큰 사람이 되려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이 말씀은 교회가 정치와 사회의 현실을 외면하라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교회가 권력 가까이에 설수록 누구의 목소리가 지워지고 있는지, 누가 두려움 속에서 예배를 포기하고 있는지 더 정직하게 물어야 한다는 요청이다.
종교 자유는 다수 종교만의 자유가 아니다. 내가 속한 교단의 예배가 보호받는 데서 멈추지 않고, 신앙과 양심이 다른 이들도 강요 없이 살아갈 수 있을 때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 기독교인에게 이는 단순한 정치적 구호가 아니라 이웃 사랑의 문제다. 믿음이 다른 사람의 권리를 지키는 일이 곧 내 신앙을 상대화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양심을 함부로 지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일이다.
특히 ‘정교회’라는 이름을 둘러싼 논의에서는 신중함이 필요하다. 어느 한 전통 전체를 전쟁이나 억압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같은 전통 안에도 평화를 위해 기도하고, 권력의 폭력적 요구에 괴로워하며, 양심을 지키려는 신자들이 있을 수 있다. 비판의 대상은 신앙을 정치적 충성의 시험대로 만들고, 예배의 자유를 통제하려는 국가 권력과 그에 협력하는 행위여야 한다.
호주의 한인 교회 역시 이 문제를 먼 나라의 갈등으로만 넘기기 어렵다. 비교적 자유롭게 예배하고 의견을 말할 수 있는 환경은 저절로 유지되지 않는다. 점령지에서 자신의 예배 공동체와 정체성을 지키기 어려운 이들을 기억하고, 전쟁으로 흩어진 이들과 소수 종교 공동체를 위해 기도할 수 있다. 또한 교회가 어느 사회에서든 특정 권력의 확성기가 아니라, 진실과 평화, 약자의 존엄을 증언하는 자리로 남도록 스스로 돌아볼 필요가 있다.
로마서 12장은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고 권한다. 이 말씀은 타인의 고통을 내 정치적 주장에 유리한 재료로 쓰지 말라는 경고이기도 하다. 점령지에서 예배와 양심의 자유를 잃은 이들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되, 그들의 고통을 단순한 선전의 언어로 만들지 않는 것. 그것이 전쟁의 시대에 교회가 지켜야 할 가장 기본적인 연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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